2023. 7. 26. 11:17ㆍ철학
"고백"의 독자는 루소에게 공평무사하지 않았다.
루소는 "대화"에서 다시 자신을 법정에 세운다.
그는 이제 배심원의 수를 줄여 한 명의 '프랑스인'으로 일반화할 것이다.
자신의 무죄 변론을 용감히 맡아 줄 사람이 전혀 없으니 그는 피고이자 동시에 변호인이 된다.
그는 자신이 쓴 책을 제대로 읽는 방법을 제시하면서, 이를 통해 오해를 샀고 비난을 들었던 '장자크'를 '어두운 삼중의 장벽'에서 구하고자 한다. 여기서 루소는 분열을 받아들인다.
그의 마지막 저서가 된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루소는 체념하고 최후의 독자로 자기 자신을 선택한다. 한 '예외적'인 존재가 갈망했던 '환대'는 응답받지 못했고, 그의 '예외성' 조차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바로 자기 자신뿐임임을 깨닫는 마지막 순간, 분열된 루소는 그의 의식 속에서 행복한 통합을 경험하게 된다.
루소 사상 전반은 "신엘로이즈"와 "에밀"에 개괄되어 있다.
이 두 저작은 '허구'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넓게 본다면 루소의 모든 저작이 '허구'라고 말할 수도 있다.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한다면 루소 사상 전체는 규정된 현상을 논하는 대신, 그것과 나란히 존재하는 상상의 세계에 호소한다.
후소의 허구는 '있음 직한 세상'이 아니라 추론과 논증을 비껴나 존재하는 현실 그 자체이다.
"신엘로이즈"는 "알프스 산기슭 작은 마을에 살았던 두 연인의 편지"를 모은 것이고 "에밀"은 '자연의 가르침'만을 따라 아이를 교육하는 선생의 이야기이다.
루소는 자신의 주인공들을 남다른 존재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들이 독자에게 남달라 보인다면 그들이 독자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들이 루소를 '예외적'이라고 본 것이 루소의 사유와 감각 방식이 사회 제도와 관습적인 풍속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그것과 동일한 구도를 갖추었다.
다만 루소는 이 다름이 희화화될 수 있음을 잘 알았다.
루소가 흔희 사교계 관습에 익숙하지 않은 소박하고 무지한 시골 사람에 대한 조롱과 풍자를 남용하는 '희극'에 저항한 까닭이 여기 있다.
루소는 자신의 허구적 인물에 적합한 일정한 환경을 만들어 준다.
"신엘로이즈"의 남녀 주인공 생프뢰와 쥘리는 프랑스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스위스 알프스 산간 마을에서 살아가며, "에밀"의 선생은 대도시 사교계와 동떨어진 곳에서 홀로 제자를 키운다.
그러나 파리 사교계와 거리를 둘수록, 루소가 정반대의 성격을 부여하는 허구적 공간은 그곳이 멀어져 온 사치와 부자유와 타락의 도시를 계속 가르킨다.
루소가 제시한 허구의 공간은 자기가 살아가는 현실의 공간이 거울에 거꾸로 비친 모습임을 독자는 깨닫게 도니다.
이런 점에서 루소의 허구적 공간은 기술적으로 완전히 '통제된' 공간이다.
루소는 사회의 인위적 관심에 적응하기 이전의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주기 위해 완벽하게 격리된 공간을 창조하고 그곳에 주인공을 넣어 '실험'해 보는 것이다.
이것이 루소의 '허구'의 역활이며, 동시에 이것이 루소의 사상을 단지 '허구'일 뿐이라고 비판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루소 독서의 마지막 단계에 초기 저작 "학문 예술론"과 "인간 불평등 기원론", 중기 저작 "사회 계약론"을 배치한 것은, 내용이 어렵기도 하지만 이 저작들에 루소의 '역설적' 글쓰기가 첨예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 저작들을 분리해서 읽는다면 루소 사상에 일관성과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아울러 각 저작에 드러난 문명 비판, 자연으로의 복귀, 만장일치의 합의에 기초한 사회 계액이라는 키워드만을 강조할 때 루소 사상을 전체적이 ㄴ맥락에서 조망하기 어려워지고, 이것이 종종 편향적인 독서의 원인이 된다.
먼저 "학문 예술론"에서 루소의 논지는 학문과 예술 자체의 무용성이 아니라 몇 가지 '기술'로 환원되어 버린 학문과 예술의 타락에 맞춰져 있다. 루소에 따르면 고대인들의 학문과 예술은 덕을 고취하고 자유를 열망하게끔 해주는 것이었으나, 현대인들은 형식화된 학문과 매너리즘에 빠진 예술을 학문과 예술의 진보라고 착학한다.
문명사회에서 학문과 예술은 유한계급의 여흥이자 소일거리로 타락했고, 후원자들은 재능 있는 학자와 예술가들을 자신의 편협한 정신과 취향에 맞춘다.
우리는 사유하난 방법을 몰라서 진리에 인민의 진리와 예술은 단순하고 소박해야 한다.
오로지 그들만이 진정한 아름다움과 허영을 자극하는 장식을,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진리와 궤변으로 무지한 자들을 미혹하는 추론을 구분할 줄 알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자연 상태라는 '허구'를 제시하면서 인위적인 사회 제도의 정당성을 문제 삼는다.
자연 상태가 허구인 것은 아무런 역사적 흔적도 남아 있지 않으므로 그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연 상태의 인간 본성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이를 위해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루소는 모든 종과 속의 개체들을 비교, 분류함으로써 모든 존재가 갈라져 나온 원형을 제시하고 그 원형과 현재 종의 친소 관계를 추적하는 당대 자연사의 방법을 취해 인간 연구의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루소가 제시한 원형으로서의 자연 상태의 인간과 현재의 우리는 전혀 다른 종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두 인간에게 공통된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자유'이다.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혼자 살아갔다.
인간이 사회를 만들어 그 안에서 살게 된 것은 자신의 '자유'를 희생해야 할 정도로 생존을 위해 긴급한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루소는 그 '필요'가 소유권의 확립에서 비롯되었으며, 부의 불평등이 인간 본성으로서의 자유를 양도하게끔 했고, 이것이 사회 제도의 기원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부의 불평등을 초래하고 자유를 양케 하므로 이를 폐지해야 하는가? 우리는 본성에 따라 살아갔던 자연 상태로 돌아가야 하는가? 이 점에 대한 루소의 답변은 "사회 계약론"에서 찾을 수 있따.
인간이 다른 이의 도움 없이 더는 혼자 살아 갈 수 없게 되었을 때 사회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모든 자연법 사상가와 사회 계약론자들이 동의한다.
그러나 루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무엇이 사회의 결속을 강화하는지, 무엇이 어떤 사회를 다른 사회보다 더 강한 사회로 만드는지 묻는다.
그것은 한 사람에게 집중된 권력도 아니고, 한 사회가 가진 부의 크기도 아니다.
사회의 구성에 참여할 때 개인은 자기가 가진 것을 양도하지 않을 수 없다.
루소는 이때 각 개인이 자신의 '전부'를 양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기가 가진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양도할 때 결합은 비로소 완전해진다.
루소의 주장은 전체에 대해 개인이 일방적으로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에 따르면 '각자 전체에 자신을 양도하므로 누구에게도 양도하는 것이 아니다.' 이때 개인은 개별 의지나 합인 전체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일반 의지'만을 따른다.
루소는 배타적인 사적 이해관계가 공동체의 결속을 약화시킨다는 점을 잘 알았따.
사적 이해관계로부터는 자유로워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일반 의지의 명령을 들을 수 있다.
우리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이 아니라 공공선과 보편 인류의 지복을 위해 행동할 수 있는가?
일반 의지의 목소리를 도대체 어디에서 들을 수 있는가?
그러한 물음에 대한 루소는 개별 의지들이 경합하는 타락한 사회보다는 자연 상태에 더 가깝게 살고, 인간의 완전한 자유의 가능성을 한낱 의미 없는 빈말로 낮춰 보는 대신 자유와 덕의 소박한 진리를 한 번도 마음속에서 잊은 적이 없는 사람은 그것을 허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변한다.
이것이 루소의 '역설'이다.
그의 주장을 단지 역설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가 초대한 허구의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로 삼을 때 우리는 그의 역설 속에서 숭고한 덕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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